인생의 구원은 이벤트가 아닌 일상 업그레이드에 있다
드라마 중독은 지팔지꼰 취향을 만든다
오은영 박사가 진행하는 <결혼지옥> 같은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반드시 받는 심리 검사인 TCI 검사의 항목 중에는 ‘자극 추구’라는 게 있다. 이 기질의 강약이 언제나 카메라상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자극 추구성이 높다면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하지 못하고 마음이 자주 바뀌며 충동적인 행동을 많이 한다고 알려져 있다.
자극 추구성이 높다는 것은 언뜻 쾌감 가득한 일상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멋진 이벤트가 끊임없이 펼쳐지는 인생 또는 감각적 쾌락으로 가득한 인생 같은 것 말이다. 오늘은 어느 멋진 누군가가 내게 고백을 해오고 내일은 직장에서 승진을 하고 모레는 복권에 당첨되는 인생. 또는 매일 매끼를 좋아하는 음식만 먹고 원하는 놀이만 하며 사는 인생. 어떤가. 생각만 해도 짜릿한가.
그런데 이 ‘자극 추구’ 항목의 영어 원문은 ‘Novelty Seeking’이다. 직역하면 자극 추구라기보다는 새로움 추구에 가깝다. 그러나 한국어로 ‘새로움’이라고 하면 이는 인지적 새로움에만 국한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에(물론 그 부분에 대해서 측정하는 하위 섹션이 포함되어 있긴 하다), 이 검사가 알아내고자 하는 보다 넓은 기질의 성격을 생각해봤을 때는 자극 추구가 더 좋은 번역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novelty’라는 단어를 ‘새로움’으로 이해했을 때만이 줄 수 있는 다른 힌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극의 상대성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극 추구성이 강하다고 하면 언뜻 추구하는 자극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오해한다. 이를테면 마라탕처럼 ‘자극적인 음식’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삼시 세 끼를 마라탕으로 먹는 사람이 여전히 마라탕에 충분한 자극을 받을 수 있을까? 소화기관 점막이야 그렇겠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에게 마라탕은 그냥 일상이다. 더 이상 새로운 것(novelty)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자극 추구성이 유독 높은 이들이 바로 사이코패스와 나르시시스트들이다(주의: 자극 추구성이 높다고 다 사이코패스와 나르시시스트라는 말은 아님). 그런데 자극 추구성이 높으면 사이코패스와 나르시시스트가 되기도 쉽지만 그들의 피해자로 걸려들기도 쉽다. 혹은 그렇지 않았더라도 그들과 관계를 오래 유지하면 덩달아 높아지게 된다.
높은 자극 추구성을 충족시키는 데는 두 가지의 강력한 현실적 장애물이 있다.
첫 번째, 내 능력의 한계와 세상의 한계 때문에 내가 원하는 자극이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로는 합리적인 보상 기대마저 배반당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세상 일인데, 매일같이 어제보다 더 좋은 일이 계속 자동으로 터질 수는 없다. 사회가 인정하는 스펙이나 능력이 부족한 케이스라면 더더욱 그렇다.
두 번째, 앞에서 말한 자극의 상대성 때문에 유입되는 자극이 계속 ‘새로 고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만 하고 좋아하는 것만 먹더라도 고점의 연속은 생각보다 충분한 자극이 되지 못한다. 최고의 자극을 느끼려면 대비 구도가 필수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 번 익숙해지면 자극의 강도를 높이는 쪽으로 향하는데 이런 크레센도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모든 것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고 한계치에서도 익숙함은 금방 찾아온다.
그럼 자극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현재보다 더 충족시킬 수 있을까? 생산적 해법은 대략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더 열심히 노력해서 자극이 될 만한 보상의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노력의 결과가 언제나 원하는만큼 원하는 때에 주어지지는 않아도, (방향이 맞다는 전제 하에) 노력을 하면 어떤 식으로든 보상의 가능성은 대체로 올라가게 돼 있다. 살 떨리는 스릴을 즐기기 위해 초인적 고난의 훈련을 마다하지 않는 속도광들이나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들, 나름의 성공 이후에도 더 큰 성공을 위해 일 중독자가 되는 이들 등이 이런 사례에 속할 것이다.
두 번째, 일상 루틴을 상대적인 저자극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어 타고난 자극 추구성 자체를 낮추거나 통제하는 것이다. 요새 ‘도파민 디톡스’로 불리는 행위도 동일 원리라 볼 수 있는데, 짠 맛에 익숙해진 후 소금의 양을 계속 늘리는 것과 반대로, 대부분의 식사를 저염식으로 즐기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습관화를 통해 뇌의 보상 심리 사이클을 바꾸는 것으로,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성격과 정체성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첫 번째보다 더 힘들다.
두 가지 다 쉽지 않다. 가만히 앉아서 자극에 대한 만족감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뇌는 언제나 쉬운 방법을 선호한다.
여기에서 원시적인 흙멘탈의 뇌는 노오력 없이 같은 조건에서 자극을 더 많이 만들고, 같은 자극도 더 크게 느끼기 위해 충격적인 해법을 내놓는다.
바로 일상적 삶의 질을 파괴해 일상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일상의 평균치를 낮추면 자극을 느낄 수 있는 이벤트의 수준도 낮아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마지막의 아슬아슬한 슬라이딩 순간에 느껴지는 아드레날린과 도파민 자극에 익숙해져 습관적으로 지각의 위험을 창조하는 이들이 있다. 꾸준히 해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을 일부러 미루었다가 막판에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위태롭게 마무리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가 일부러 이러겠는가 싶지만 실제로 이런 극적인 마무리는 직후에 엄청난 해방감과 긴장 해소를 불러오기 때문에 이 기작에 중독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붐비는 행인 사이를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빠르게 빠져나가 불가능해 보였던 ‘제시간 도착’을 이뤄내면, 이건 이제 단지 일상이 아니다. 나의 신속한 판단 능력과 운동신경에 대한 승인이다. 심지어 중간에 지하철과 버스 시간이 서로 딱딱 맞아떨어지기까지 해 한치의 시간 낭비도 없었다면? 이건 마치 주인공 보정 같은 행운까지 함께 하는 날이다. 왠지 내가 이단 헌트라도 된 것 마냥 으쓱하기까지 하다.
이런 의미 부여에 맛을 들이면 남들에게는 그저 일상에 불과한 ‘제시간 도착’도 나에게는 임원급 승진 마냥 뿌듯한 일이 될 수 있다. 참으로 경제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소확행도, 소박함도 아니다. 오히려 도박 중독과 비슷하다. 이런 것이 습관화되면 안정된 페이스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왠지 성취감이 적고 이후 휴식도 그만큼 달콤하지가 않아서 재미가 없게 느껴진다. 그리고 정공법으로 큰 목표를 성취할 생각은 점점 없어지게 된다. 이미 임원급 승진 마냥 뿌듯한데 뭐하러 진짜 승진을 하려 노력하겠는가.
이 원리에 익숙한 이들은 대인관계와 타인 통제에도 동일한 원리를 적용한다. 배우자에게 폭행을 일삼다가 가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달콤한 호의를 베풀면 상대는 그 극적인 순간의 특별함에 중독된다. 며칠을 굶긴 아이는 맨밥에 물을 말아주어도 감사하게 받아먹는다. 다른 사람에게는 일상에 불과할 일을 엄청난 이벤트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은 나르시시스트 커플 또는 나르시시스트-코디펜던트 커플로 이루어진 부모를 둔 흙수저 가족 구성원들에게서 자주 나타난다. 특별한 것을 갖거나 경험하거나 남에게 선사해서 인정받고는 싶은데 노력은 하기 싫으니 이렇게 되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아무도 자신이 그런 해괴한 해법을 실행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기에는 너무 수치스러운 무의식의 계산 결과이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높은 자극 추구성은 ‘안정적 평온함’을 무가치한 것, 지루함, 정체, 혹은 심지어 불안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개선에 자원과 노력을 투자하지 않는다. 안정성은 대비 구도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지속되는 갈등을 만들거나 불편을 방치하거나 위험을 감수하여 인위적인 고저차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나르시시스트 관계가 ‘Drama Cycle(드라마 순환)’을 반복하는 이유다. 나르시시스트 당사자든, 그 착취의 피해자든, 여기에 중독되면 고저차가 없는 인생은 재미가 없어진다. 짧은 시간조차 이벤트가 없이는 버틸 수가 없게 된다. 저자극의 평온한 일상,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건강한 관계나 직업적 성취에서 얻는 건강한 자극 따위는 준다 해도 본인이 싫다고 걷어차버리는 지팔지꼰 취향이 된다.
특별한 이벤트는 눈에 띄기 때문에 내 인생에 실제 끼치는 영향력보다 더 대단하고 좋아보인다. 특히 어릴 때 건강한 일상을 경험한 적이 없는 흙멘탈이라면 안정된 일상이 만들어내는 힘 같은 것을 알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99% 이상이 일상이다. 이벤트는 그 일상의 결과적 지표로서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억지로 만든 이벤트는 치안과 인프라가 엉망진창인 도시에서 단 하루 열리는 화려한 축제 같은 것이다.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흙멘탈들은 종종 일상과 이벤트의 우선순위를 혼동한다. 일상은 괴로울 뿐이고, 인생의 재미는 특별한 여행이나 기념일처럼 가끔 찾아오는 이벤트에서만 느꼈던 경험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이란 이벤트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당신은 인스타에서 사진이 예쁘게 나오는 랜드마크가 있다고 해서 상하수도 인프라가 안 돼 있는 도시에서 살고 싶은가. 수돗물이 안 나오는데 축제나 기획하자고 결정하는 시장은 도시를 제대로 운영하고 있는 것일까. 그 불편이 축제나 랜드마크로 잊혀질 수 있을까. 일상에 투자하지 않는 내 인생이 지금 그 모양일 수도 있다. 일상의 끔찍함을 탈출하는 방법을 계속 축제 기획에서 찾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해봐야 한다.

